2013년 8월 말의 아이돌 잡담. 음악_잡담

1. f(x)의 신보에서는 설리의 진격이 눈에 띈다. 찰진 필과 깍쟁이 미성을 가진 크리스탈이 빅토리아와 함께 f(x)란 케이크의 스폰지를 이루고 SM 보컬 적통인 루나의 생크림이 얹히는 사이사이 보이쉬하고 쿨한 엠버가 딸기로 얹혀 있다면, 여태 스폰지 속에 숨어 있던 설리가 스폰지 사이 시럽으로 변했다.

SM은 트레이닝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보컬을 쓰는 편인데, 이번 앨범에서 설리는 그 어떤 SM 발매반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를 낸다. 아이돌 판에서 가장 생으로 꺅꺅 질러대는 목소리라도, 이보다 "일반인" 같을 순 없을 것이다. 아무리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노래방에서 조금만 흥을 내면 이보다는 필을 담을 것이다. 아주 훌륭한 랩을100, 아이돌 평균 랩 실력을 50, 일반인 평균을 0이라고 하자면, 이번 설리의 목소리는 필시 마이너스로 한참 내려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슷한 랩 프레이즈를 크리스탈과 번갈아 부르는 부분들을 들어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대조된다. 타이틀인 "첫 사랑니"("Attention boys, 나는 좀 다를 걸")에서 약간 애매하다고 느꼈다면, "시그널"("센티멘털, 로맨스, 그런 거 관심 없는"), "Step"("발길 가는 대로 걷는, 바람 부는 대로 달려") 등을 들어보라.

과격하게 비틀린 가사로 극단을 달리던 그들이, 이번 앨범에서는 급선회를 했다. 가사의 화자-청자 관계를 생각해 보자. 대상의 존재가 거의 삭제되어 있기에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관심도 없다는 듯하던 기존의 곡들에 비해, 이번에는 제법 적극적으로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들이다. 자의식 속을 헤매는 듯한 기조는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당장 "첫 사랑니"만 해도 가사에 등장하는 모든 모티브들이 각각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다. 거의 생활의 레벨로 내려와 구체적인 말들을 건네는 비-러브송 "Step", 상징과 은유 사이에 많은 내용이 생략되었음에도 주제의식이 명료한 "Kick", "Airplane" 등을 보라.

그 속에서 설리의, 보컬 트레이닝을 마이너스로 받은 듯한 목소리는, 이 앨범의 가사들을 노래에서 랩으로, 랩에서 다시 "대화"로 끌어내려 놓으며 더욱 가깝게 말을 걸어온다. 당장 이 앨범 속에서만 해도 훨씬 "프로답게" 노래하고 랩할 수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 설리가 가끔씩, 테크닉도 연출도 없는 듯한 목소리를 연출하는 테크닉을 부린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쉴새 없이 인상적인 소리와 장면들을 던져주는 f(x)의 음악 속에서도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부드러운 중음역의 "여자애스러운" 미성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잘 묻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목소리를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패기다. 아이돌의 음악적 역량, 특히 랩 실력이 곧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풍토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설리는 f(x)의 보컬 정체성의 파이에서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시도는 설리의 외모와 설리의 캐릭터가 전제되기에 매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일 터이다. 그 까다로운 필요조건을 f(x)의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 내용 추가 : [차우진의 워드비트] 마술적 내러티브와 장소 없는 감수성 : f(x) "첫 사랑니" via weiv.

2. 크레용팝이나 그 사장이 일베를 하거나 말거나 내게는 일말의 흥미가 없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그에 대한 대응도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응이 과하다면 그것에는 크레용팝이 던져주는 낯섬도 어느 정도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아이돌이 가상 연인 혹은 허구적인 이상형으로서의 캐릭터로 기능한다고 전제한다. 전면에 드러나는 매력이 당장 사귀거나 같이 자고 싶게 만드는 형태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돌은 이성애적 맥락에서 작동한다. 그렇게 어필하는 각각의 멤버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이 되면,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매력을 드러내는 다각형을 이룬다. 고전적인 표현이지만 "누구나 그 중 한 명은 좋아할 수 밖에 없을 조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A멤버로 입문했는데 점점 B멤버에게 빠졌다" 류의 이야기들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아이돌 시장이 과포화를 넘어서면서 변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멤버 개개인보다 팀 자체의 캐릭터가 더 중요해지는 방향성의 저 멀리에 크레용팝이 있다. 웬만한 아이돌은 외모가 탁월해 첫 눈을 사로잡는 멤버가 (타입별로) 한 명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할 외모는 아니나 엉뚱한 성격이 매력적인 멤버도 한 명쯤 있다. (그리고 고음셔틀도 한 명쯤.) 그러나 사장 본인이 아예 "너무 예쁜 애는 빼고 고만고만한 애들로 뽑았다"고 하는 크레용팝은, 멤버간의 분담이 다른 팀에 비해 매우 흐린 듯하다. 일단 그런 의상으로는 누구라도 외모 담당을 주장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반면 다른 팀에 한 명씩 있는 "4차원"을 멤버 전원이 담당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아니, 그룹 자체가 "4차원 담당"인 것이다. 즉 이들은 "털털하고 별나서 귀여운 후배가 소속된 그룹"이 아니라, "털털하고 별나서 귀여운 후배들 덩어리"다. "빠빠빠"의 가사도 이와 상통한다. 이 곡의 가사는 매우 의미가 없고, 동시에 매우 매끄럽다. (즉 "의사 선생님", "전-기-충-격" 같은 덜컹거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새로운" 아이돌이다.

3. EXO의 "으르렁" 비디오를 보면, 소녀시대의 초기 뮤직비디오와 무대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인원을 동시에 무대에 올릴 때 무대가 좁아 공간 활용을 좀처럼 하지 못하고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소원을 말해봐"와 "Sorry Sorry"가 첫 완성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12명이 서는 무대가 무리 없는 수준이나, "덩어리 군무를 하면 꽤 근사하지?"의 수준을 완전히 넘어서서, 이 정도 인원이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스펙터클을 드디어 이뤄내고 있지 않나 한다.

4. 아이돌의 이성애적 어필을 그래프로 그려, 왼쪽 끝에 노골적 섹스어필을, 오른쪽 끝에 극단적인 가상성을 둔다고 해보자. 왼쪽은 고전적 형태의 "섹시 가수"를, 오른쪽 끝은 하츠네 미쿠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다. 아이돌 판의 흐름은 왼쪽에서 점차 오른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의 주류에서 가장 오른쪽인 것을 크레용팝이라 해도 될까? 그렇다면 EXO는 그 바로 왼쪽에 있을 것이다. 크레용팝과 걸스데이를 비슷한 부류로 묶는 경향도 있는 것 같은데, Y축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달렸을까? 내게는 그래도 걸스데이는 꽤 정통파에 가깝게 느껴진다... 어쨌든 2007년을 기점으로 2세대 아이돌을 정의한다면, EXO, 크레용팝, 걸스데이 사이의 어딘가에 하나의 선이 그어질 것 같다. 2세대와 2.5세대를 가르든, 2세대와 3세대를 가르든.

5.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새 앨범이 매우 좋은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6. 남자가 "우리 샤이니"라 말하면 빈축을 사야만 하는 이 역차별 사회에 대해 남성연대는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셈인가.

7. 더 이상의 준비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데, 샤이니는 그만 뜸 들이고 얼른 지구 정복을 해줬으면 좋겠다.

덧글

  • 시릴르 2013/09/02 13:40 # 답글

    남자가 "우리 샤이니"라 말하면 빈축을 사야만 하는 이 역차별 사회에 대해 남성연대는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셈인가.(2)

    어쩜 이리 제 맘이랑 같으신지! 남자도 우리 샤이니, 우리 엑소라고 부르고 싶고 부를 수 있다구요ㅠㅠㅠㅠ
  • mimyo_ 2013/09/02 23:37 #

    호우리호샤이니를 허하라!! ㅎㅎ
  • 검마르 2013/09/02 16:48 # 답글

    설리가 젤 좋터군요
  • mimyo_ 2013/09/02 23:38 #

    조금 지나치게 예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ㅎㅎ
  • hurtownia kawy xxl 2022/09/16 19:55 # 삭제 답글

    그런 작품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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