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l B. : Discovery 작업 일기. 미묘합니다

트리뷰트 앨범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서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처음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텀블러에 수치플레이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는 기타 커버 포스팅과 관련해서였고, 별로 고민할 것 없이 보컬 곡으로 해도 될 것이었다. [수치플레이 <Game> (Acoustic) | <Game> (Electric) | <그럴 수 있겠지> (Electric)] 그런데 노래도 못 하고 기타도 못 치지만 그냥 재미 삼아 최소한의 테이크로 한다는 취지의 수치플레이와는 달리, 잘 하시는 분들이 그득그득하게 돼 버린 프로젝트에 이런 수준의 레코딩을 제출해도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고, 당분간은 (적어도 미묘, 라는 이름으로는) 보컬 곡보다는 인스트루먼틀 위주로 가고 싶다는 (관련글) 생각도 있어서, 역시 비-보컬 곡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사실 "연주곡"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주된 멜로디를 악기가 연주한다는 개념은, 라이브나 라이브의 재현 혹은 라이브를 다듬은 것이란 개념과 이어져 있기에, 레코딩된 음원을 주 목적으로 삼는 작업에서 미묘한 지점이 있다. 내가 악기 연주를 더럽게 못 한다는 것은 둘째 치고, 현란한 리드신스가 멜로디를 끌고 가는 퓨전재즈나 프로그레시브의 질감을 싫어한다는 것은 셋째 치고, 신스로 소리 만들기에 주안점을 둔 상황에서 신스가 보컬을 대체해 주 멜로디를 노래하게 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넌센스라는 느낌이 있다.

그럼 그런 나의 제약조건 속에서 어떻게 '리메이크'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어느 정도 비슷한 문제를 아마도 다른 분들도 느끼셨거나 생각하고 계신 것 같고, 실제로 (내 기준에서는) 리믹스의 형태에 가까운 작업을 하신 분들도 계시다.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불만이나 이의도 없으나, 이번의 내 작업은 리믹스가 아닌 리메이크가 되길 원했다.

내가 판단하는 리믹스는 원곡의 음원에 대한 리터치고, 리메이크는 악보에 의한 리터치다. 레코딩된 음원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요소를, 보컬이든 기타든 드럼이든 신스든, 곡 전체에서든 토막이든, 가져다가 그대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리믹스. 리메이크는 멜로디나 화성 진행, 가사, 혹은 그 전부, 혹은 그 일부를 가져오는 것으로, 실제로는 악보를 만들고 보는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개념적으로는 악보에 기록된 기호를 소재로 한다. 리믹스를 할 때 원곡의 음원(중 일부)를 가공해서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도 되듯, 리메이크에선 악보를 부분적으로 재현하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재가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아의 곡 중, 다른 악기나 다른 뉘앙스로 연주하더라도 원곡을 아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보컬을 제외한 멜로디 요소 중 특징이 강한 것(예를 들어 <No. 1>의 도입부, <Valenti>의 종결부 등)을 찾았고, 그 중에서 <Discovery>를 선택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싱글컷이 아닌 앨범트랙이란 점도 마음에 들었고, <奇跡>와 더불어 처음 보아의 일본반을 들을 때 귀를 확 사로잡았던 곡들 중 하나였으며 또한 내 작업에도 흔적을 많이 남긴 곡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마이너한 트랙을 선택함으로써 보아덕 인증.


BoA - Discovery / Album Valenti (2003)


악보까지 그려서 쓰면 좀 오바하는 것 같고. 여튼 주 멜로디는 두 성부로 진행되는 극초반 테마를 가져와 세 성부로 나눴음. 처음엔 네 성부로 나눠서, 지금 버젼에선 0'27" 가량에서 등장하는 톤까지 사용해 주 멜로디 라인을 만들었었는데, 너무 번잡하고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얘는 화성위주로 뒤에서 깔아주도록 했다. 대신 중간에 이 톤으로 테마가 나가는 순간이 잠깐 있긴 한데, ㅎ 뭐 사실 거의 안 들림. 오르갠도 역시 인트로/아우트로 부분의 화성을 가져왔는데, 자세히 들어 보면 두 종류의 진행이 존재하지만 역시 티 안남. ㅎ 오르갠 페이드인이 좀 더 서서히 들어오는 느낌이길 바랐는데 잘 안 돼서 다시 들을 때마다 좀 신경 쓰임.

부글거리는 소리는 NI Massive로 만들었는데, 필터만 가지고는 리듬에 따른 소리 변화가 잘 살지 않아서 Crysonic nXtasy로 좀 만져줌. 당초의 계획은 이것만으로 리듬을 쓰고 드럼을 넣지 않는 것이었는데, 2개의 리듬 패턴을 만들어 쓰긴 했으나 (역시 티 안남) 아무래도 너무 단조롭기도 하고, 리듬감도 충분히 살지 않아서 답답해하던 차에 그냥 재미로 드럼 걸었더니 너무 확 달라지는 게 느껴져, 더이상 돌이키지 못하고 드럼을 걸게 되었음. 결과적으로는 매시브의 저음과 드럼, 베이스까지 들어감으로 인해 저음역이 선명하게 살아나기 힘든 편곡이 돼 버린 부분도 있음. 매시브는 킥에서 사이드체인을 걸어 컴프로 눌렀는데, 4'02"에서만 사이드체인 피드를 낮추려고 했더니 파워코어 사이드체이너는 오토메이션이 안 되더라. 결국 이 부분만 뭔가 다른 걸로 손봤는데 뭐였는지 생각 안 남. (...)


Mimyo - Discovery by ABoAB


3'01"의 딜레이 피드백은 사실 살짝 피크가 뜨면서 찢어지게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믹스하긴 했는데, 막판에 스펙트라라이브 걸어주는 과정에서 이게 리미팅이 걸려버려서 (...)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넘어갔는데 사실 두고 두고 불만이긴 함. 너무 맹숭맹숭해서, 이럴 거면 차라리 피드백 올려주는 거라도 좀 더 시원하게 확 올려주는 게 나았을 텐데, 하는. 그 외에도 (특히) 스네어/하이햇 등의 밸런스에 대해서는 자잘하게 불만이 많이 남지만.

원곡에서는 코러스 이후에 "D-I-S-C-O-VE-R-Y" 하는 멜로디가 나오는데, D를 반박자 앞으로 빼서 못갖춘 마디로 시작하는 8박자 루프를 만들었음. 목소리는 타스캄 포터블 레코더로 녹음했는데, 야외의 현장음을 같이 녹음했으나 마이크 한쪽이 접촉이 안 좋은 걸 미처 수리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전부 한쪽을 날려버리고 모노소스로 작업했다. 각각 9개씩의 샘플을 4/4 박자 위에 배치했으니, 후반부에는 이리나는 정박에 그대로 가고 에리코는 1.5배 느리게, 나는 2배 빠르게 진행을 시켜서 시간차를 좀 만들어 봤음. 다만 몇 번씩 반복되고 끝나는 지점이 꼭 맞게 해서 마지막엔 셋이 같이 "D"라고 하는 부분을 만들려고 나름 계산을 좀 했는데, 마지막이 별로 티가 안 나서 아쉬움. 근데 뭐 딱히 어떻게 개선해 볼 방법이 없는 것 같네.

원곡에서 꽤나 인상을 남기는 "사, 사, 사, 아이, 아이, 아이"하는 보컬은, 그대로 할까 생각도 해보긴 했는데, 일본어판 원곡에서 이후에 이어지는 가사 첫 음절을 말 더듬 듯 되풀이하는 것을 뒷부분 없이 재현하는 게 과연 재밌을까 싶어서, Discovery의 스펠 중에서 잘라 리듬만 활용했음. 마침 "I"가 들어 있기도 했고.

나 이외의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제법 캐릭터 있게 잘 받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에리코의 "디!"하는 목소리가 뭔가 큐 사인 날리는 의욕 넘치는 목소리 같아서 루프와 루프가 만나는 지점에 집어 넣으려고 했으나 느낌 안 삼. 이리나의 목소리는 어학 테이프의 "리슨 앤 리핏" 풍의 목소리여서 마음에 들었는데, 그 얘길 했더니 진짜냐며 "Shit"을 외쳤음. ㅎ

괜찮게 나오는지 스케치 단계에서 확인하려고 일단 샘플 잘라 붙여놓고 시작한 걸 그대로 가져가려다 조금 고생을 했다. 세 목소리가 전부 음량도, 인풋레벨도, 수음거리도, 장소도 다르다 보니 볼륨 조절이... 9개씩 토막내서 100곳 이상에 붙여놓은 걸 일일이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팬 값 등이 다른 여러 채널에 흩어놨기 때문에 믹서에서 관리도 안 되고. 더구나 자르는 타이밍이 좋지 못했던 샘플들도 있었는데, 이미 너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손대는 게 힘겨워진 부분도 있다. 결국 정말 문제 있다고 느껴지는 몇 개는 손으로 만졌지만, 끝까지 들쭉날쭉하고 심지어 컴프로 인한 배경소음 증폭도 제맘대로인 상태까지 와버렸다. 다음부터는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받은 소스는 스케치 단계에서부터 음량 부분을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든지, 팬 값이 다른 5개 채널을 사용했으면 4인(3명+이리나 스페인어) 전부에게 5개씩 채널을 만들든지, 스케치 마치고 나서 미련 갖지 말고 싹 지운 뒤 다시 작업하든지, 그런 식으로 해야 할 것 같음. 아, 다시는 이렇겐 안 해.

핑백

  • an igloo trembling : Saturday Morning Cartoon - Possibilities (Come With Me) Remix 작업일기. 2011-03-29 08:06:49 #

    ... 한 20초 분량을 만들긴 했는데, 하다가 지치는 건 둘째 치고 이미 넣어 버린 다른 악기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냥 삭제했다. 생각해 보니 좀 아깝네. (...) Discovery를 작업하면서 NI Massive에서 노이즈로 리듬 만드는 것이 재밌었는데, 여러 가지로 아쉬웠던 부분들이 있어서 그걸 더 잘 해보려고 노력했음. 원곡의 ... more

  • an igloo trembling : 비공식/무단 보아 트리뷰트 Model B. 작업노트 - 2. 2011-04-29 08:57:50 #

    ... 작업 과정 1) 개별 곡들에 대해, 프로젝트 전체의 맥락과 별도로 평가를 내리거나 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작업한 <Discovery>의 작업기는 포스팅한 적이 있고 바로가기 야마가타 트윅스터, 모임 별, 38picofarad는 작업노트를 포스팅한 바 있다. Yamagata Tweakster - <Sweet Impact [Never Been T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트위터위젯